OBITUARY
부고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Fed)의 거장 의장이 6월 22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숫자들은 악보의 음표처럼 그에게 길잡이가 되었다. 1930년대 맨해튼 북단 워싱턴 하이츠에서 자랄 때, 앨런 그린스펀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뉴욕 양키스의 기록을 쫓으며 숫자를 길잡이로 삼았다. 1990년대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으로서 당시 기록상 가장 긴 미국의 경제 호황을 이끌었을 때도 숫자는 그의 길잡이였다.
그를 경제학으로 이끈 것은 바로 숫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순회 재즈 밴드에서 연주하며 공연 중간 휴식 시간마다 재무 관련 서적에서 읽었던 숫자들 말이다. 다른 연주자들이 앉아서 대마초를 피울 때, 그는 미국 산업과 J.P. 모건에 관한 책을 읽었고, 그러고는 색소폰을 집어 들고 헨리 제롬 오케스트라에서 빅밴드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뉴욕시의 음악원인 줄리어드에서 수업을 들었고, 스탠 게츠와 같은 천재들과 함께 연주했다. 그들은 감각으로 연주했지만, 그는 자신이 숫자들을 신뢰했듯 악보에 적힌 음표들을 신뢰했다.
1945년 무렵 그는 대공황에 대한 분석으로 경제학을 뒤바꾼 존 메이너드 케인스 시대의 뉴욕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케인스의 탁월한 분석력은 존경했지만, 그의 원대한 구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데이터만 고수했다. 컨설턴트로서의 첫 직장에서 그는 경기 순환의 전환점을 포착하는 재능으로 고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57년, 철강 재고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경기 침체가 임박했음을 직감한 것이 그 예다. 모든 것은 숫자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삶에는 데이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국가 개입의 폐해를 열렬히, 본능적으로 신봉했던 친구 아인 랜드를 통해 그것을 배웠다. 1960년대가 저물어가던 무렵, 미국의 성장률 둔화와 물가 상승에서 정부 비대화의 필연적인 부작용을 읽어내기는 쉬웠다. 본래 그는 광적인 당파주의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랜드와 그녀 주변 인물들의 자유지상주의 정신을 받아들인 '재즈 시대의 보수주의자'로서 베트남전 시대의 미국 속에서 그는 자연스레 공화당으로 기울었다.
그는 권력층 인사들과 교류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1975년부터 그는 바바라 월터스와 교제하기 시작했고, 생의 마지막 40년은 역시 TV 저널리스트인 앤드리아 미첼과 함께 보냈다. 그는 리처드 닉슨과도 인연을 맺었는데, 닉슨은 그를 선거 캠프 자문위원으로 영입했다. 닉슨의 당파적 분노에 질리기도 했지만, 그는 제럴드 포드 행정부 하에서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직을 즐겁게 수행했다. 이제 악보대 뒤에서 벗어나 직접 지휘봉을 잡은 셈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198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그는 캠프에 합류했다.
그의 커리어를 결정지을 자리에 그를 앉힌 것은 레이건이었다. 연준 의장으로서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인사가 되어, 거대하고 복잡한 미국 경제라는 기계가 최상의 상태로 작동하도록, 가장 감미로운 연주를 하도록 다독였다. 그의 임기는 불협화음으로 시작되었다. 취임한 지 불과 두 달 뒤인 1987년 10월 19일, 이른바 '블랙 먼데이'가 닥쳤고, 미국 증시는 하루 만에 20% 이상 폭락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일일 하락폭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은행들을 설득해 신용을 유지하도록 압박했고, 행정부가 재정 적자 감축을 추진하도록 밀어붙였다. 그것이 신뢰를 회복시킬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준의 독립성을 지키는 데 맹렬했다. 조지 H.W. 부시 행정부가 1990년대 초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역할을 하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독립성이 곧 의장이 자기 할 일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연준 화법(Fedspeak)'이라 불리는 모호한 언어의 가장 유명하고 능숙한 구사자가 되어, 대통령과 의회의 계획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내놓곤 했다. 한 단어로 충분할 때 절대 여섯 단어를 쓰지 않았다. 미국 언론은 열광적인 청중이 되어 그를 지켜보았다.
1990년대에 거장의 장악력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해 보였다. 1994년 그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래리 서머스 부장관과 함께 위기 해결사 3인방을 구성했다. 동아시아와 러시아의 금융 혼란을 관리했고, 거대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구제금융을 필요로 했을 때는 연준이 나서서 이를 해결했다. 그의 연준은 전례 없는 호황을 통해 미국 경제가 순항하도록 유지했다. 1997년 폴 크루그먼은 이렇게 썼다. "앞으로 몇 년간 미국의 실업률을 예측하는 간단한 모델을 원한다면, 여기에 있다. 그건 그린스펀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그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오차를 제외하고 말이다."
결국 그린스펀 씨는 감각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기술이 경제 작동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연준 위원들이 경제가 너무 과열되고 있다고 우려할 때, 그는 진정하라고 했다. 숫자가 틀린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생산성 혁명이 물가 상승을 억제할 것이라 믿고 호황을 그대로 두었다. 주가 급등이 불협화음을 야기할 조짐을 보이자, 그는 여전히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하다고 믿으면서도 "비이성적 과열"에 대해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상황이 그의 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새 천년이 되자 그는 생산성 성장과 그로 인해 발생한 주식 시장의 호황이 결국 인플레이션을 초래할까 우려했다. 주가가 폭락하고 경기 침체가 닥쳤을 때, 경제는 예전처럼 그의 말 한마디에 반응하지 않았다. '고용 없는 회복'은 위험해 보이는 호황으로 이어졌고, 그의 금리 인상도 이를 꺾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미국 경제를 노래하게 만든 인물로 칭송받으며 박수 속에 연준을 떠났다.
그가 회고록을 출간하기도 전에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쳤다. 이 위기는 규제 완화에 대한 그의 신념을 뒤흔들었다. 그는 자신의 연준을 방어했다. 성장을 촉진했던 저금리 정책, 가벼운 규제 기조, 그리고 붕괴 이전에 연준이 마련했던 구제금융 조치들을 옹호했다. 그는 성장을 저해한 책임이 오바마 행정부에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불협화음은 계속되었다. 과연 그는 정말 그런 거장이었던 걸까? 그저 유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운이 좋았다가 나중에 운이 다했던 것일까? 숫자가 이쪽이든 저쪽이든 답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Fed)의 거장 의장이 6월 22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숫자들은 악보의 음표처럼 그에게 길잡이가 되었다. 1930년대 맨해튼 북단 워싱턴 하이츠에서 자랄 때, 앨런 그린스펀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뉴욕 양키스의 기록을 쫓으며 숫자를 길잡이로 삼았다. 1990년대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으로서 당시 기록상 가장 긴 미국의 경제 호황을 이끌었을 때도 숫자는 그의 길잡이였다.
그를 경제학으로 이끈 것은 바로 숫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순회 재즈 밴드에서 연주하며 공연 중간 휴식 시간마다 재무 관련 서적에서 읽었던 숫자들 말이다. 다른 연주자들이 앉아서 대마초를 피울 때, 그는 미국 산업과 J.P. 모건에 관한 책을 읽었고, 그러고는 색소폰을 집어 들고 헨리 제롬 오케스트라에서 빅밴드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뉴욕시의 음악원인 줄리어드에서 수업을 들었고, 스탠 게츠와 같은 천재들과 함께 연주했다. 그들은 감각으로 연주했지만, 그는 자신이 숫자들을 신뢰했듯 악보에 적힌 음표들을 신뢰했다.
1945년 무렵 그는 대공황에 대한 분석으로 경제학을 뒤바꾼 존 메이너드 케인스 시대의 뉴욕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케인스의 탁월한 분석력은 존경했지만, 그의 원대한 구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데이터만 고수했다. 컨설턴트로서의 첫 직장에서 그는 경기 순환의 전환점을 포착하는 재능으로 고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57년, 철강 재고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경기 침체가 임박했음을 직감한 것이 그 예다. 모든 것은 숫자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삶에는 데이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국가 개입의 폐해를 열렬히, 본능적으로 신봉했던 친구 아인 랜드를 통해 그것을 배웠다. 1960년대가 저물어가던 무렵, 미국의 성장률 둔화와 물가 상승에서 정부 비대화의 필연적인 부작용을 읽어내기는 쉬웠다. 본래 그는 광적인 당파주의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랜드와 그녀 주변 인물들의 자유지상주의 정신을 받아들인 '재즈 시대의 보수주의자'로서 베트남전 시대의 미국 속에서 그는 자연스레 공화당으로 기울었다.
그는 권력층 인사들과 교류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1975년부터 그는 바바라 월터스와 교제하기 시작했고, 생의 마지막 40년은 역시 TV 저널리스트인 앤드리아 미첼과 함께 보냈다. 그는 리처드 닉슨과도 인연을 맺었는데, 닉슨은 그를 선거 캠프 자문위원으로 영입했다. 닉슨의 당파적 분노에 질리기도 했지만, 그는 제럴드 포드 행정부 하에서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직을 즐겁게 수행했다. 이제 악보대 뒤에서 벗어나 직접 지휘봉을 잡은 셈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198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그는 캠프에 합류했다.
그의 커리어를 결정지을 자리에 그를 앉힌 것은 레이건이었다. 연준 의장으로서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인사가 되어, 거대하고 복잡한 미국 경제라는 기계가 최상의 상태로 작동하도록, 가장 감미로운 연주를 하도록 다독였다. 그의 임기는 불협화음으로 시작되었다. 취임한 지 불과 두 달 뒤인 1987년 10월 19일, 이른바 '블랙 먼데이'가 닥쳤고, 미국 증시는 하루 만에 20% 이상 폭락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일일 하락폭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은행들을 설득해 신용을 유지하도록 압박했고, 행정부가 재정 적자 감축을 추진하도록 밀어붙였다. 그것이 신뢰를 회복시킬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준의 독립성을 지키는 데 맹렬했다. 조지 H.W. 부시 행정부가 1990년대 초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역할을 하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독립성이 곧 의장이 자기 할 일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연준 화법(Fedspeak)'이라 불리는 모호한 언어의 가장 유명하고 능숙한 구사자가 되어, 대통령과 의회의 계획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내놓곤 했다. 한 단어로 충분할 때 절대 여섯 단어를 쓰지 않았다. 미국 언론은 열광적인 청중이 되어 그를 지켜보았다.
1990년대에 거장의 장악력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해 보였다. 1994년 그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래리 서머스 부장관과 함께 위기 해결사 3인방을 구성했다. 동아시아와 러시아의 금융 혼란을 관리했고, 거대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구제금융을 필요로 했을 때는 연준이 나서서 이를 해결했다. 그의 연준은 전례 없는 호황을 통해 미국 경제가 순항하도록 유지했다. 1997년 폴 크루그먼은 이렇게 썼다. "앞으로 몇 년간 미국의 실업률을 예측하는 간단한 모델을 원한다면, 여기에 있다. 그건 그린스펀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그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오차를 제외하고 말이다."
결국 그린스펀 씨는 감각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기술이 경제 작동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연준 위원들이 경제가 너무 과열되고 있다고 우려할 때, 그는 진정하라고 했다. 숫자가 틀린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생산성 혁명이 물가 상승을 억제할 것이라 믿고 호황을 그대로 두었다. 주가 급등이 불협화음을 야기할 조짐을 보이자, 그는 여전히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하다고 믿으면서도 "비이성적 과열"에 대해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상황이 그의 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새 천년이 되자 그는 생산성 성장과 그로 인해 발생한 주식 시장의 호황이 결국 인플레이션을 초래할까 우려했다. 주가가 폭락하고 경기 침체가 닥쳤을 때, 경제는 예전처럼 그의 말 한마디에 반응하지 않았다. '고용 없는 회복'은 위험해 보이는 호황으로 이어졌고, 그의 금리 인상도 이를 꺾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미국 경제를 노래하게 만든 인물로 칭송받으며 박수 속에 연준을 떠났다.
그가 회고록을 출간하기도 전에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쳤다. 이 위기는 규제 완화에 대한 그의 신념을 뒤흔들었다. 그는 자신의 연준을 방어했다. 성장을 촉진했던 저금리 정책, 가벼운 규제 기조, 그리고 붕괴 이전에 연준이 마련했던 구제금융 조치들을 옹호했다. 그는 성장을 저해한 책임이 오바마 행정부에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불협화음은 계속되었다. 과연 그는 정말 그런 거장이었던 걸까? 그저 유능했던 것일까, 아니면 운이 좋았다가 나중에 운이 다했던 것일까? 숫자가 이쪽이든 저쪽이든 답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